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에이 산의 잠행 === 주에이(寿永) 2년(1183년) 2월 21일에 안토쿠 천황이 처음으로 고시라카와인에 대한 조근(朝覲) 행차를 행했으나,(《햐쿠렌쇼》, 《교쿠요》, 《깃키》) 고시라카와인은 역수(逆修, 생전에 사후 명복을 비는 불교 행사)와 일정이 겹친다며 연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타이라노 무네모리의 강한 요망으로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무네모리는 3월에 추토사를 보내려 준비하고 있었기에 일정을 바꿀 여유가 없었다]. 추토사를 보내는 것이 지연된 4월 9일에 간신히 호쿠리쿠(北陸, 북륙) 정토(征討)를 기원하는 기도가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비롯한 16곳의 신사에서 이루어졌고(《교쿠요》) 17일에 타이라노 고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하는 100,000기의 대군이 호쿠리쿠도(北陸道)로 출발했다(《햐쿠렌쇼》). 그러나 헤이케가 총력을 모아 보냈던 추토군은 5월 11일에 '''구리가라 고개(倶利伽羅峠) 전투'''에서 궤멸하고 말았고(《교쿠요》 5월 16일조), 헤이케와 [[카와치 겐지]] 사이의 군사적 균형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7월 22일에는 엔랴쿠지의 승강이 산에서 내려와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의 병력이 동탑(東塔)의 소지인(惣持院)에 성곽을 쌓고 있다고 밝혔다(《깃키》). 24일에 안토쿠 천황이 홋슈지도노에 행행했는데, 《깃키》 7월 24일조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헤이케가 고시라카와인과 안토쿠 천황을 끼고 서국(西国)으로 물러날 방침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수도 교토를 버리려는 헤이케의 의도를 찰지한 법황은 25일 새벽 미나모토노 스케토키(源資時), 타이라노 도모야스만을 데리고 수레에 올라 홋슈지도노를 빠져나와 구라마로(鞍馬路)・요카와(横川)를 지나 히에이 산에 올라, 동탑의 엔유방(円融坊)에 들어갔다(《깃키》 7월 25일조). 고시라카와인의 탈출을 알게 된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로쿠하라에 불을 지르고 안토쿠 천황과 겐레이몬인(建礼門院), 고노에 모토미치(近衛基通), 그리고 헤이케 일족을 거느리고 다급히 도주했다. 26일에는 구교와 덴조비토들이 잇따라 고시라카와인에게 몰려갔고, 엔유방(円融坊)은 흡사 인노고쇼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27일, 고시라카와인은 미노 겐지(美濃源氏)의 긴베노 카쟈{錦部冠者, 야마모토 요시쓰네(山本義経)의 아들}와 악승(悪僧) 진케이(珍慶)를 앞세워 산을 내려와 렌게오인(蓮華王院)에 들어갔다. 이듬해 28일, 구교 의정이 열리고 헤이케 추토와 안토쿠 천황의 교토 귀환 및 삼종신기의 반환 문제가 의론되었다. 나카야마 다다치카, 후지와라노 나가카타는 헤이케 추토보다도 삼종신기의 반환이 우선이라고 주장했지만, 기소 요시나카나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의 병력이 교토를 점거한 상황에서 >“전 나이다이진(內大臣)이 어린 주상을 끼고 신경(神鏡)과 검(剣)과 새(璽)를 가져갔다” 며 헤이케 추토의 선지(宣旨)를 내렸다(《햐쿠렌쇼》, 《교쿠요》, 《깃키》). 이에 헤이케는 패군(賊軍)으로 전락했고, 요시나카·유키이에의 겐지 군대가 ‘관군’으로서 교토 수호를 맡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